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로 학살 (문단 편집) ==== [[추축국]]의 포로 학살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Himmler_besichtigt_die_Gefangenenlager_in_Russland._Heinrich_Himmler_inspects_a_prisoner_of_war_camp_in_Russia%2C_circa..._-_NARA_-_540164.jpg|width=98%]] || || [[소련군]] 포로수용소를 시찰하는 [[하인리히 힘러]]. 저 사진에 보이는 수십만의 소련군 [[포로]]들은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인리히 힘러가 명령으로 대부분 굶겨 죽여버렸다고 한다. || * [[독소전쟁]] - 당시 [[나치 독일]]은 [[소련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하였다. 독소전 당시 독일에 잡힌 자료에 따라 최대 57%에서[* 극히 소수의 견해로 60% 이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쪽은 그리 신빙성이 없으므로 논외로 한다. 저 수치는 전후에 소련의 수용소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수치가 아니냐는 추측 또한 존재할 정도이다.] 최소 20%까지 달라지는데 이렇게 들쭉날쭉한 이유는 학자마다 서로 증거로 제시하는 자료가 일치되지 않고 제각각이어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적게 잡아도 25~30%는 된다고 보는 쪽이기는 하다. 다만 이전에 57%는 러시아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라 신뢰성이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57.5%라는 수치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제시한 수치이다.[* 다만 니얼 퍼거슨이 포로사망률 자체를 좀 높게 잡는 편이기는 하다. 아래에 서술된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도 최대치에 가깝게 잡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당시 [[스탈린]]의 삽질과 독일의 기습으로 제때 후퇴하지 못한 수십~수백만에 달하는 소련군이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발생하였으며 나치의 인종 정책은 포로로 잡힌 이들 중 유대인과 공산당원, [[정치장교]]를 즉결 처형시켰고, 살아남은 포로들도 각종 노역에 투입되어 죽어나갔다. 당연히 이들을 가두는 수용소는 그냥 허허벌판에 가시철조망을 두른 후 수용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에게 물자와 의약품 또한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포로들은 물품 부족과 질병으로 떼거지로 죽어나갔다. 부가적인 문제로는 독일군은 갑자기 늘어난 포로들에게 지급할 식량이나 의약품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줄 생각도 없었으니 별 의미는 없다. 그런데 정작 스탈린은 포로로 잡힌 이들을 배신자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가족들까지도 연좌제로 굴라그로 보냈다.[* 스탈린의 아들도 포로가 되었는데 예외는 ~~애비를 제외하고~~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은 이대로 [[아사|굶어 죽든가]], 전쟁이 끝나고 [[굴라그]]로 끌려가든가, 아니면 독일군에게 붙어서 당장 목숨을 구하든가를 택해야 하는 눈물 겨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은 기 사예르 [[독일 국방군]] 상병의 수기인 잊혀진 병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당사자인 포로들은 열심히 싸워놓고도 조국으로부터 배신자라고 불리니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 이후 전황이 독일군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하고 소련군이 독일군 점령지 각지로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헛간같은 작은 건물에 소련군 포로들을 집어넣고 건물을 불태워 산채로 태워죽이는 잔혹한 방식으로 포로를 대량학살하고 지역을 떠났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타버린 포로들의 시체를 보고 경악한 소련군이 크게 분노하며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보복하겠다고 맹세할 정도였다.]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4명이 하루에 잡곡 한 공기를 배급받았으며 어떨 때에는 하루 종일 물만 주었다. 이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죽은 포로들의 시체들을 뒤졌는데 이것이 발각될 경우엔 즉결 [[총살]]되었다... 소련군에게 사로잡힌 추축군 포로들의 운명도 썩 좋지는 못해서 독일군 300만을 포함하여 도합 500만에 달하는 추축군 포로들은 15~36%가량이 사망했으며[* 14.7%는 Richard Overy가 <독재자들>에서 제시한 수치이며 Ferguson은 에서 35.8%의 사망률을 제시했다.] 그중 SS 포로의 생존율은 더욱 낮았다. 다만 소련측의 경우 초반의 상황이 워낙 열악해서 그런 거고[* 초반에 산업지역과 곡창지대를 다 털려서 식량조차 자급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스탈린도 조국을 침략한 자들에게 식량을 줄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진짜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일단 소련측의 상황이 호전된 이후에 잡힌 포로들의 운명은 썩 좋다고는 못 해도 전쟁 초반에 비해선 그래도 나아졌다. 그나마 국가 단위에서 제네바 협약은 형식적으로나마 지키기는 했으나[* 이것도 소련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미국, 영국, 독일 학자들이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고 반박했다-출처: Eastern Front of World War II 1939-1945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 복수심에 불타는 상황에서 개개인이 그걸 얼마나 잘 지켰을지? 독소전에 관해선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글랜츠와 안토니 비버의 저서에서도 기술된 내용이다. * [[말메디 학살]] -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아르덴 대공세]] 중 말메디에서 독일 제1SS기갑사단의 파이퍼 전투단이 투항해오는 [[미군]]을 학살한 사건. 몇곳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졌으며 총 약 300여명의 미군 포로들이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미군 포로들 중 베레트(Wereth) 지역에서 붙잡힌 흑인 미군 포로들은 항복한 뒤 심하게 구타당한뒤 산채로 눈이 뽑히고, 손마디를 절단당하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하거나 움직이는 차량에 산채로 짓뭉개지는 등 참혹한 고문을 통해 학살당했다. SS는 또한 프랑스에서 항복한 세네갈계 프랑스군 부대를 포로로 잡지 않고 학살해버린 전적도 있다.] 이 때 독일군은 가만히 서있는 포로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기관총 사격으로 죽여버리고 '''웃으면서 시체를 짓이기거나 급소를 걷어차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확인사살까지 하는''' 악랄한 짓을 저질렀는데 이는 어떻게 하든 쉴드를 칠 수 없는 악랄한 전쟁 범죄이다. 당연히 이 학살의 범인들은 전후 재판을 통해 사형 등의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 다만 나중에 이걸 갖고 미군이 독일군 포로를 똑같이 대우해도 상관없다는 명령을 일시적으로 내린 게 문제가 되기는 했다. 그냥 전쟁범죄자들만 잡아다 처벌하면 그만인 사안이었기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 제42보병사단은 포로로 잡은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병사 200명을 총살했다. 유해는 1976년 뉘른베르크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근거리에서 총을 맞고 죽어있었다고. 친위대에 대한 증오가 종전까지 지속되었다는 증거.[* 당시 연합군에게 SS의 만행과 포로 학살 행각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증오에 찬 연합군 병사들이 SS 포로를 처형해버리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기에 보복을 두려워 한 SS 병사들은 국방군 병사들과는 다르게 투항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 [[다하우]] 학살 - [[다하우#s-1.1|다하우 강제수용소]]가 해방될 당시 수용소를 지키고 있던 [[슈츠슈타펠|SS]] 경비병들은 미군에게 항복했으나 수용소의 참상을 보고 분노한 미군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아예 경비병들을 해방된 수용자들에게 던져줘서 복수할 기회를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말려야 할 장교들조차 불구경 하듯이 방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범죄가 맞으나 자업자득이라는 평이라 동정 겸 (학살치고는) 긍정적인 여론이 나왔고, 병사들 또한 형식적인 조사만 받고 처벌받지 않았다. [* 태평양 전선에서는 다하우 학살과 비슷한 대규모의 보복 학살은 없었으나 포로 수용소 해방 이후 그곳의 참상을 보고 격노한 연합군 병사들이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 일본군 경비병들에게 린치를 가해 죽이거나 즉결 처형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 사례 역시 연합군 측에서 사실상 방관하였으며 형식적인 조사만 치루고 처벌은 하지 않았다.] * [[태평양 전쟁]] - 2차 세계대전에서 콰이강의 다리에 나온 것은 엄청나게 관대한 수준이고 [[언브로큰]] 같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경험해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생지옥이었다. 당장 국내에도 발간된 언브로큰 책을 읽다보면 아예 민족멸살을 하는 절멸수용소만 아니지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거의 판박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전후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27% 수준이지만 중국군 포로의 사망률은 56% 정도이며 이를 고려하면 전체 사망률은 40% 정도로 추산된다. 중국 측에서는 70~80% 정도가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여부는 불명. 일본군의 이러한 포로 학대는 당연하게도 미군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위에 나온 말메디 학살의 여파의 예와 비슷하게 일본군 포로에 대한 학살[* 당시 태평양 전선에 있던 미군은 일본군의 포로 학대 만행과 가짜항복을 이용한 자폭전술에 대해 크게 분노하여 암묵적으로 포로를 잡지 않는 관습을 만든 상태였기 때문에 수용소에 이미 억류된 일본군 포로를 보복학살하기 보다는 항복하는 일본군을 모두 무시하고 사살하거나 전투 중에 붙잡은 포로들을 후속부대에 인계하지 않고 학살하는 것을 택했다. 3일간의 휴식과 아이스크림 제공만이 미군의 일본군 포로 처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밀해제된 문서가 발견됐을 정도로 미군의 일본군 포로 처형 역시 결코 드물지 않았고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막고 일본군 포로를 산채로 포획할 것을 장려했다.]과 보복이 잦아졌다. * [[바탄 죽음의 행진]] - 단, 사살이 아닌 '식량배급 없는 행군' 이라는 보다 훨씬 잔혹한 방식으로 행해졌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츠지 마사노부]]가 주도를 한 건 아니다. 물론 [[츠지 마사노부]]가 포로 학살 명령을 위조해서 보낸 건 사실이나 애시당초 중요 명령은 문서로 받는 게 원칙이던 일본군인지라 그 명령을 실행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로에 대한 일본군 특유의 잔혹함은 지휘관인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방침에 따라 그대로 실행됐고, 이후 혼마는 그 책임으로 [[총살형|사형에 처해졌다.]] * [[난징 대학살]] - [[일본군]]의 가장 큰 [[전쟁범죄]] 중 하나로 2000년대 들어 당사자인 중국과 대만[* 당시 중국의 국체는 [[중화민국/국민정부|중화민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재조사 및 영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다만 실제했던 사건인지 전후 재판특유의 누명인지의 여부는 사료적 증거가 없어서 논란이 있는 사건중 하나이기도하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미 [[오송 전투]]에서부터 독일식 무장을 갖춘 근대화된 중국군[* 이라곤 하지만 그건 개인 무장과 군장, 훈련 정도 얘기고 일본군보다 강하긴 했지만 포병, 기갑, 해,공군은 거의 없던거나 다름없어서 교환비가 압도적으로 손해였고 난징 전투만 해도 8만명 정도가 포로로 잡혀 학살당했다.]에게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원한이 커져 당시 수도인 난징까지 대본영 명령도 씹으면서 점령했고 3만명 당 17명 정도의 헌병이 있었을 정도로 군기율이 떨어져 총, 칼, 수류탄, 생매장 등 온갖 방법으로 중국군 포로들이 학살당했다. 물론 단순 원한보다는 일본군 운송 시스템이 전근대적이라 보급이 부족해 포로들을 먹일 식량도 없었고 포로는 원래부터 인간취급 안하던 일본군 풍습으로 사령부부터가 방조하다 못해 주도적으로 포로학살을 하게끔 해 당시 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가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을 선고받았고 전범의 사형 방식인 [[교수형]]으로 사형 당했다.[*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당시 마쓰이 이와네는 와병(결핵)으로 잠깐 전장을 떠나있었고 방계 황족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사령관 대리로 난징에서의 전투 및 학살을 주도했다. 역으로 마츠이가 추후 학살에 대해 듣자 황족인 아사카는 못건드려도 동조한 자기 부관들은 몹시 책망했고 후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난징 방향으로 사당을 세워 추모했다 한다. 아사카노미야는 후에 있는 [[신적강하]]를 제외하곤 별다른 불이익 없이 90대가 되는 나이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하인리히 힘러, version=749, paragraph=2.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